Page 178 - 선림고경총서 - 29 - 산암잡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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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았습니다.이에 강기슭을 올라가 저택으로 다가가 문지기에게
            이곳이 뭐 하는 곳이냐고 공손히 묻자,이곳은 관청인데 구경하고

            싶다면 들어와도 막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문 안으로 들어가 보
            니,큰 의관에 긴 허리띠로 단장한 사람이 정청(正廳)에 반듯이 앉
            아 있기에 그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습니다.어디

            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서울에서 왔다 하고,이곳이 무슨 관아냐고
            물으니 이곳은 천하태을뢰산(天下太乙牢山)으로 여기에서는 소 백
            정만 전문적으로 다스리는 곳이라 하였습니다.그래서 ‘이웃집에

            살던 백정 황씨네 넷째아들이 죽은 지 열흘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곳에 있느냐’고 물었더니,있다 하기에 그를 한번 만나게 해달
            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씨네 넷째는 목칼을 덮어쓰고 쇠고랑에 묶인 채 끌려
            오다가 우리 외동생을 보자 깜짝 놀라서,그대가 어찌하여 이곳까

            지 왔냐고 묻기에 임지로 부임하던 중 우연찮게 이곳에 들렀다고
            했습니다.그리고는 어떻게 하면 그대의 죄를 벗겨 줄 수 있느냐
            고 물었더니,자신은 죄가 너무 무거워 벗어날 길이 없지만 관리

            께서 부임해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권하여 120마리의 소를
            죽이지 않으면 죄를 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이 끝나자 고개를 돌려보니 그 저택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
            었습니다.외가동생은 이때부터 사람들에게 소를 잡지 말도록 권
            했는데 그가 말한 수효를 모두 채우던 날 밤 황씨네 넷째가 외가

            동생을 찾아와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저는 관리께서 소를 죽이지
            말도록 권한 은덕으로 이미 죄값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
            습니다.만일 집에 전하실 서신이 있으시면 제가 가져다 드리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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