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9 - 선림고경총서 - 30 - 원오심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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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오심요 上 89
이를 상식적으로 논한다면 그가 “한 물건도 가져오질 않았다”
고 하였는데,무엇 때문에 대뜸 그에게 “놓아버리게”라고 말하였
을까?이것은 법안으로 미세한 곳까지 비추어 그를 위해 큰 병통
을 끄집어내어 부끄러움을 알도록 해준 것임을 알겠다.그는 그래
도 깨닫질 못하고 다시 질문하므로 거듭 점검해 주었더니 그대로
기왓장 부서지듯 얼음이 녹듯 하였다.비로소 밑바닥이 뒤집어지
면서 일시에 벗어나 이윽고 사나운 호랑이를 조복받고 독사를 길
들이는 데 이르렀다.이 어찌 안으로 느끼고 밖으로 감응함이 아
니겠느냐.
방거사(龐居士)의 식구들이 모두 불을 쪼이고 있었다.거사가
말하기를 “어렵구나,어려워!열 섬의 유마(油麻)를 나무 위에 펴
기가”라고 하자,방거사 부인이 말하기를 “쉽다,쉬워!모든 풀 끝
에 조사의 뜻이 있다”하였다.그러자 딸인 영조(靈照)는 “어렵지
도 않고 쉽지도 않다.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잔다”라고
말했다.
보통때 사람들에게 이 화두를 거량하면,영조가 한 말이 힘을
던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며,방거사와 그 부인이 ‘어렵
다’혹은 ‘쉽다’한 것은 싫어한다.그러나 그것은 말을 따라 이해
한 것일 뿐,그 근본 뜻은 전혀 살피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말의 자취가 일어나면 다른 길들이 그것으로부터 생
기게 된다.말을 잊고 뜻을 체득할 수 있다면 비로소 이 세 사람
이 각각 한 솜씨에서 나와 밑 빠진 대바구니를 함께 들고 새우도
건지고 조개도 건지면서,닿는 곳마다 살인의 기틀이 있고 곳곳마
다 몸을 벗어날 길이 있음을 보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