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2 - 선림고경총서 - 34 - 종용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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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항상 소중히 받들되 저녁에 잘 때와 아침에 일어나서는
문안을 드려야 비로소 은혜를 아는 효순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동산은 이르되 “노승이 만일 그를 간호한다면 병 있음을 보지
못하리라”하였다.이는 평생의 행리에서 길 떠남에 임해서 힘
을 얻은 곳이다.동산이 다시 묻되 “이 껍데기를 여의고는 어
디서 나를 만나겠는가?”하였는데 승이 대답이 없으니,동산이
게송을 읊되 “학자가 많으나 하나도 깨달은 이가 없으니/허물
은 혀끝에서 찾으려는 데 있을 뿐이다/형상도 종적도 잊고자
한다면/힘써서 정성껏 공(空)속을 걸으라”하였다.이렇게 송
하고는 머리를 깎고 종을 울리고 선당에 앉아 대중을 하직하고
입적을 고하매 대중이 통곡을 하니,동산이 다시 눈을 뜨고 우
치재(愚痴齋)를 베푼 뒤에 다시 7일을 연장했다가 다시 대중에
게 하직하고 앉은 채로 갔다.
대정계등록(大定繼燈錄)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황통(皇
統:1141~1148,金나라의 연호)연간에 함평부(咸平府)대각사
(大覺寺)의 법경(法慶)선사는 불국 백(佛國白)선사의 법을 이었
는데 일찍이 서기의 소임을 맡았다.처음에는 사주(泗州)의 보
조사(普照寺)에 머무르다가 나중에 숭소(嵩少)로 옮겼다.변경
(汴京)이 무너지면서 포로로 끌려가 북방에서 소를 치며 살았
는데,강승(講僧)들은 그를 알아보았다.나중에 동경(東京)으로
옮겨서 사는데 시자가 동산록을 읽다가 우치재를 장만했다는
대목에서 이르되 “옛사람은 매우 특이했습니다”하니,대각이
이르되 “내가 떠난 뒤에 그대는 불러 보라.만일 돌아오면 도
력이 있었음을 알라”하더니,나중에 그 시기를 미리 알고 게
송을 읊되 “금년 5월 초닷새/4대가 본 주인을 떠나리니/백골
은 바람결에 날리게 하여/시주들의 묘터를 차지함이 없게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