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3 - 선림고경총서 - 34 - 종용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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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용록 下 23
리(菩提)라”한 뜻을 물었더니,도오가 사미를 불러 정병(淨甁)
의 물을 채워 오라 하매 앞에 든 것과 같이 깨달았다.
석상이 도오의 회상에 있기 두 여름 만에 인가를 받았으나
때마침 회창(會昌:845)의 난리를 만나 담주의 유양(劉陽)땅의
어느 옹기점[陶家坊]으로 숨어들어 낮에는 나다니고 밤에만 의
지했다.대중(大中:847~859)초에 어떤 승이 동산(洞山)으로부
터 와서 동산의 동정을 전하되 “첫가을 늦여름에 여러분이 혹
동으로 혹 서로 왔다 갔다 하지만 만 리에 풀 한 포기 없는 곳
을 향해 곧장 가야 한다”하고는,양구했다가 이르되 “그런데
만 리에 풀 한 포기도 없는 곳을 어떻게 향해 갈꼬?”하니,석
상이 이르되 “문만 나서면 바로 풀밭이니라”하였다.그 승이
다시 동산에게 가서 사뢰니,동산이 이르되 “이는 천오백 명의
선지식이 될 만한 말씀이다.이 대당국(大唐國)안에 능히 몇
사람이나 될꼬?”하였다.
이로부터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이 비로소 드러나서 석상의
도량에 머무르니 과연 오본(悟本:洞山의 證處)에 부합되어 20
년 동안에 대중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왕왕에는 장좌불와하는
이가 있어 우뚝함이 말뚝 같으매 고목당(枯木堂)이란 말이 이
때부터 생긴 것이다.
승이 물은 말에 “쓰레기를 헤치고 부처를 본다”는 것은 같은
데,협산은 이르기를 “만일 칼을 휘두르지 않으면 어부가 둥지
에 깃들인다”하였고,석상은 이르되 “그는 국토가 없거니 어
디에서 그를 만나겠는가?”하였다.만송은 이르노니 “진리에
들어 깊이 이야기하기로는 석상만 못하지만 문정의 시설은 협
산보다 백 보나 떨어졌다”하노니,두 보따리를 한데 싸는 격
이 아니겠는가?천동은 어떻게 송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