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 - 선림고경총서 - 36 - 벽암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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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한 단계 낮추었는지 아닌지를 누가 식별하랴”하였는데,설
두스님은 도리어 그의 귀착점을 알았던 것이다.그는 여기에서
한 번은 추켜 올렸다 한 번은 깎아 내렸다 한 것이다.“흰구름
겹겹이 쌓이고 붉은 해는 높이 솟았다”하였는데,이는 “풀은
더부룩하고 연기는 자욱하다”는 것과 몹시 흡사하다.여기에 이
르러서는 실낱만큼도 범부에 속하지 않고,성인에게도 속하지
않는다.온 법계에도 감추지 못하고 모두를 덮으려 해도 덮을
수 없다.이는 이른바 ‘무심(無心)의 경계’이다.추워도 차가운
줄 모르고 더워도 뜨거운 줄 모른다.모두가 하나의 큰 해탈문
이어서 왼쪽을 돌아볼 짬도 없고,오른쪽을 쳐다보면 벌써 세월
은 지나간다.
나찬(懶瓚)스님은 형산(衡山)의 석실(石室)에서 은거하였는데,
당(唐)덕종(德宗)이 그의 명성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그를 맞이
하려 하였다.사신이 석실에 이르러 “천자의 조서가 내렸으니,
스님은 일어나 성은에 감사하는 절을 올리시오”라는 명을 하였
다.나찬은 쇠똥불을 뒤척거리며 토란을 구워 먹고 추위에 떨며
콧물을 턱까지 흘리면서 대답도 하지 않았다.사신은 웃으면서,
“우선 스님께서는 콧물부터 닦으시지요”라고 하자,나찬스님은
말하였다.
“내가 어찌 속인을 위해서 콧물을 닦는 짓을 하리오.”
그는 끝끝내 일어나지 않았다.사신이 돌아와 이 사실을 아
뢰니,덕종은 몹시 흠모하여 찬탄하였다.그는 이처럼 맑고 고
요하면서도 밝고 또렷하여,남의 휘둘림을 받지 않고 확실히 잡
아들여 마치 무쇠로 주조한 자와 같았다.
선도(善道)스님 같은 이는 사태(沙汰)를 겪은 뒤에 다시는 승
려생활을 하지 않았다.사람들은 그를 석실행자(石室行者)라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