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9 - 선림고경총서 - 36 - 벽암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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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 中 59


                 이다.각각 제자리에 안주하며,각각 본체에 해당하여,(경계에
                 현혹되지 않는)완전히 눈먼 장님과 같을 것이다.
                   조주스님이 말하였다.

                     첫닭이 울면 축시(丑時)라.
                     근심스러이 돌아보노니,그저 허물투성이.
                     저고리와 장삼(승려다운 몸가짐)은 하나도 없고

                     가사(袈裟)의 그림자만 조금 남아 있구나.
                     잠방이에 속곳이 없고,바지는 발 넣을 곳 없으니
                     머리 위 흰머리는 너덧 말이라.
                     본디 수행할 때는 중생을 제도코자 하였는데
                     그 누가 알았으랴,도리어 어리석은 놈이 될 줄을.

                   참으로 이러한 경계에 이르면 어느 사람인들 눈을 뜨지 않으
                 랴.마음대로 엎어지고 나자빠지는 대로 두어도,모든 곳이 다

                 ‘이 경계’이며,다 ‘이 시절’이다.시방세계에 창문[壁落]도 없고
                 사방에도 문이 없다.그러므로 “처음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
                 가,다시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다”고 말한 것이다.설두스님
                 은 매우 솜씨가 좋아서 그 좌측에 한 구절을 붙이고 우측에도
                 한 구절을 붙여 마치 한 수의 시처럼 이루어 놓은 것이다.
                   “파리한 학은 차가운 나무 위에서 발돋움하고,미친 원숭이
                 는 옛 누대에서 휘파람 분다.”설두스님은 이에 이르러 스스로

                 의 잘못을 깨닫고 얼른 말하였다.“장사의 한없는 뜻이여,쯧
                 쯧!”이는 마치 깊은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과도 같다.설두스
                 님이 일갈(一喝)을 했지만,아직은 철저히 끊어 버리지 못한 것
                 이다.만일 산승이었다면 이렇게 말하질 않고,“장사의 한없는
                 뜻이여!땅을 파 더욱 깊이 묻어 버리리라”고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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