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1 - 선림고경총서 - 37 - 벽암록(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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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 下 81
도 겨우 조금 상응됨이 있을 뿐이다.비록 그렇긴 하지만 한 점
도 속일 수 없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산은 여전히 산이며,물은 여전히 물이다.이 자리는 조작이
없으며 헤아리거나 생각도 없다.마치 일월이 허공에 운행하듯
이 잠시도 멈추지 않으며,또한 일월 스스로 허다한 이름[名]과
모습[相]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마치 하늘이 두루
덮어 주고 땅이 널리 만물을 실어 주는 것처럼,마음이 없기에
[無心]만물을 키운다.그러면서도 일월 스스로가 많은 일을 했
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천지는 무심하기에 영원하다.마
음이 있었다면 언젠가는 끝이 있을 것이다.도를 얻은 사람 또
한 이와 같다.공용(功用)이 없는 데에서 공용을 베풀며,모든
역경(逆境)이건 순경(順境)이건 모조리 자비의 마음으로 받아들
인다.이런 무심의 경지에 이르러서도 오히려 스스로 경책하기
를 “깨치고 깨치고 깨쳐서 깨친다는 것도 없고,그윽하고 그윽
하더라도 (이 경계를)당장에 꾸짖어야 한다”고 하였으며,또한
“일[事]마다 통하고 물[物]마다 분명하지만 통달한 자는 이 말
을 들으면 어둠 속에서 깜짝 놀라리라”하였고,또한 “범부를
뛰어넘어 성인의 경지로 들어가면서 소리조차 내지 않으니 가
만히 있는 용은 푸른 못이 맑을까 못내 두려워하네.인생이 오
래도록 이 같을 수만 있다면 대지에 어느 누가 한 이름인들 남
기랴”라고 하였다.비록 그렇긴 하지만 또한 이 소굴에서도 뛰
어나와야만 한다.
왜 듣지 못하였느냐,교학(화엄경 십지품)의 말을.
“제8부동지보살(第八不動地菩薩)이 공용(功用)이 없는 지혜
로 한 티끌 속에서 큰 법의 바퀴[法輪]를 굴리어,언제나 행주
좌와함에 득실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지혜의 바다로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