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4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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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있는 지상보살과 견성 이후의 과후果後보살, 대력大力보살을 구분
한다. 문수보살과 같은 이들은 대력보살, 즉 성불한 여래의 다른 이름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은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길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보살의 청정지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중생에 대한 헌신에도 그대로 적용
되기 때문이다. 원래 계율이란 출가수행상의 장애를 차단하기 위한 방
편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자칫 계금취견으로 고착하여 중
도 실천의 대원칙을 흔드는 집착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절대
화하지 말고 상황에 따라 지키기도 하고, 깨기도 하고, 열어주기도 하
고, 닫아걸기도 하는(持犯開遮) 탄력적 태도가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
런데 여기 절대적 지계가 있다. 해탈, 견성, 대열반에서 나오는 청정지
계가 그것이다.
보살의 중생 교화를 윤리적 봉사의 차원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탈, 견성, 대열반이 그 답이 되는 것이다. 이익중
생과 청정지계에 화합애경和合愛敬을 더하면 성철스님이 승가에 내린 세
가지 가르침(諭示)이 된다. 그렇다면 사랑과 존경으로 화합하는 진정한
길 역시 오직 해탈, 견성, 대열반이라야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성철스님의 가르침은 완전한 깨달음을 향해 윽박지르는 자리
에서 한 걸음도 떠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부분적 깨달음(分證)과 일시
적 체험에 대해 전면 부정의 자세를 취한다. 어떤 경계에 의미를 부여
하기 시작하면 불교의 최고 가치를 포기하는 일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
이다. 성철스님이 말했던 ‘영원한 진리를 위해 일체를 희생한다’는 가슴
속의 쇠말뚝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출세간은 패러다임의 전환을
의미한다. 세간의 틀 속에서 불교의 가치를 논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
에 속하지만 그 한계는 뚜렷하다. 적어도 불교도에게는 불교가 절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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