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27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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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의 실천이다. 그것은 앉거나 눕는 모양과 상관이 없는 일로서 오로

             지 지금 이 마음을 밝게 깨닫는 실천으로 관철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
             런 점에서 좌선을 원인으로 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다만 깨달음이 좌선하는 일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해서 이것을 좌선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선사들의 설법은 눈앞에 있

             는 청법자의 생각과 관념을 공략하는 데 집중된다. 6조스님 당시 선문
             의 수행자들은 좌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신수스님식 장

             좌불와가 수행의 전형으로 이해되던 상황이었다. 이에 6조스님은 좌선
             이 아니라 깨달음이고, 모양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반면 성철스님은 동시대 선문의 수행자들이 제대로 닦아보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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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달음을 자처하는 것이 문제 라고 보는 입장에 있었다. 사실 이러한
             풍조는 좌선 수행에 핵심이 있지 않다는 6조스님이나 마조스님의 가르
             침을 오해한 결과이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진지한 좌선 수행을 제안하

             는 차원에서 좌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문장을 생략한 것이다.
                다음으로 여래의 중도성을 말하는 ②의 구절이 생략되었다. “경전에

             ‘만약 여래가 앉았다거나 누웠다거나 말을 한다면 그것은 삿된 도를 행
             하는 것’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하면 오는 곳이 없고 가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바로 뒤의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다(無生
             無滅)’는 구절로 재요약된다. 불경에서는 말과 생각을 떠난 불이중도의

             진리를 직관하도록 돕기 위해 반복하여 거듭 설하는 방식을 자주 취한
             다. 이를 통해 언어도단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이렇게 반복되는 구절을 만나면 대부분 하나의 핵심 구




              130   동정일여, 몽중일여도 안 된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러고도 견성이니 깨달
                 음이니 한다면 그건 차라리 외도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퇴옹성철(2015), p.74.



                                                             제5장 무생법인 ·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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