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1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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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송에는 중봉스님의 그러한 철저함이 요약되어 있다. 인용문은 그중
일곱 번째 게송이다. 선수행과 그 깨달음은 언어적 표현의 차원이나 마
음으로 이해하는 틀을 훌쩍 넘어서 있다. 그러므로 불법을 생각과 언어
에 호소하는 방식에 대해 유보적일 필요가 있다. 설사 그 가르침을 수
용하더라도 그 한계성을 알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
여래선과 조사선을 나눈 것 역시 상황에 따른 방편의 일환이었을 뿐
이다. 진공묘유의 도리를 실증한 입장이라면 어떻게 표현해도 옳다. 만
약 그렇지 못하다면 부처의 염화와 가섭의 미소조차 핵심을 벗어나 있
다. 오烏와 언焉 자는 마馬 자와 유사하여 배움이 서툰 사람들이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누런 낙엽을 황금이라고 말하여 우는 아이를 달래
주는 것처럼 불교에서는 무수한 교학적 가르침을 베풀었지만 그것이 진
정한 황금으로서의 여래심은 아니었다. 이 점을 모르고 문자만 따라다
니면 온갖 착각과 집착이 일어나게 된다. 성철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 보이고 2조가 세 번 절한 것조차 틀렸는데
여래선이니 조사선이니 하는 명칭이야 두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게
다가 둘을 놓고 우열을 논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어찌
부처님과 달마스님의 본뜻이 연꽃과 절 세 번에 있겠는가? 134
이처럼 성철스님은 여래선, 조사선이라는 표현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게송을 인용하였다. 이치와 현상이 원융
한 여래심을 표현하자면 수천수만이 되겠지만 언어적 표현에 집착한다
면 모든 것이 착오가 되고 만다는 뜻이다.
134 퇴옹성철(2015), p.115.
제5장 무생법인 · 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