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47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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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현사스님은 영운스님이 복사꽃을 보고 다시 의심할 것이 없게 되었
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아직 확실히 깨닫지 못했다는 말로 그를 점검
한다. 문자만 보자면 앙산스님이 향엄스님보다 낫고, 현사스님이 영운스
님보다 낫다. 그렇지만 그 상호 간에는 우열이 없다. 오직 산을 말하면
물을 가리키는 자유로운 영혼의 교류가 있을 뿐이다. 성철스님은 치절
스님의 상당법문을 인용하여 조사선과 여래선이 우열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이 중 ①의 구절이 생략되었다. ‘대체로 진정한 금이 되려면 백 번의
단련이 필요하듯, 본분종사의 거듭되는 담금질이 필요하다(大底眞金百煉,
要須本分鉗鎚)’는 내용이다. 앙산스님이나 현사스님이 이렇듯 과격한 방식
으로 상대의 깨달음을 부정한 것은 그 초보적인 깨달음을 더욱 단련해
주기 위한 일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구절을 왜 생략한 것일까? 그것은 구경각만을 깨달음으
로 인정하는 성철스님의 입장과 관련이 있다. 일시적 눈뜸을 깨달음으
로 인정하는 돈오점수적 입장에서는 이처럼 조사선과 여래선을 나누어
말하는 언어 관습을 글자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래의 깨
달음이 움직임 없는 자리를 보여준다면, 활발한 작용의 현장을 드러내
는 것이 조사선의 특징이며 장점이라고 주장하는 흐름이 있었다는 말
이다.
성철스님이 조사선과 여래선이 다르지 않음을 거듭 강조한 것은 바
로 이러한 흐름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향엄스님과 영운스님
의 이후 행적을 보면 분명 그들에게는 한 번 깨달아 영원히 깨닫는(一悟
永悟) 깨달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생략된 구절은 이해하기에 따라 먼저 깨달은 뒤 거듭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완성해 나간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래
제5장 무생법인 · 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