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8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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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기 때문이다. 해오는 유심이므로 여기에 의미를 두면 무심으로 가

            는 길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간의 문제다. 경전에서
            의 보임은 제8지 무공용지無功用地 이상의 수행을 가리킨다고 얘기된다.

            무공용지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공부가 되는 단계이다. 그런데 선문
            에서는 여기에 다그치는 공부를 제시하여 찰나간에 구경각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교가에서는 제8지 이상이면 무공용이므로 더 이상 애쓸 것 없이

               자유자재로 생활하는 가운데 저절로 성불의 길로 나아간다 하였지
               만 선문에서는 아직 길 위에 있다 하여 부정하였다. 왜냐하면 교가
               의 방법대로라면 성불하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
               문이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단박에 원만한 불과를 성취케 하기 위

               해 무공용지에 들었더라도 다시 화두를 주어 대답을 다그치고 용맹
               정진을 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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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렇기 때문에 보임은 구경각 이후의 자재한 삶이자, 무위무작
            의 실천이자, 부처의 행위라야 하는 것이다. 다만 성철스님도 완전한 깨

            달음 이후 구체적인 실천의 측면에서 노력하는 일을 보임이라 할 수 있
            다는 유연함을 보여주기는 한다. 즉 이 점에 한정하여 점수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이치로는 돈오라야 하지만 일에 있어서는 점수가
            필요하다(理須頓悟, 事要漸修)’는 말은 돈오점수의 대강령이다. 원오스님도

            이 말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성철스님은 같은 말이지만 그것이 규봉스
            님의 돈오점수와 전혀 다른 뜻을 갖는다고 해석한다. 규봉스님은 ‘마음

            속의 망념을 제거한다(心中除妄)’는 의미에서 점수이지만, 원오스님은 ‘구



             169   퇴옹성철(2015),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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