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0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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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면 깨달음의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돈오이다. 그래서 조사선은 ‘말끝에 바로 깨
닫기(言下卽悟)’를 기본원리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마음을 속이지 않는다(不欺自心)’는 전제하에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과연 깨달았는가? 광선狂禪과 같은 선종의 말류
에서는 본각의 원래 깨달음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제
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질문이 진지하다면 대부분 자신의 현주소가 그
렇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수행의 실천에 들어가게 된
다. 간절하게 알고자 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청정한 알아차림이 일어나
고, 성철스님이 강조하는 것처럼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자리에서 깨
달음이라는 사건을 직접 체험한다. 깨닫고 보니 이제까지 믿어 왔던 본
래의 깨달음과 다르지 않은 바로 그것이다. 거듭 확인해 보아도 본각과
시각은 서로 다르지 않아 스스로 본래면목으로 돌아왔음을 안다. 나와
대상의 이원적 대립을 벗어나 중도실상의 자리에 직접 도달한 것이다.
이것이 본래의 깨달음과 실천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만나서 하나가 되
는 증오證悟의 풍경이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라는 사건의 체험(始覺)은 믿음의 차원에서 시작
하여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구경각의 차원에 이르기까지의 제반 단
계를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다. 성철스님은 구경각의 단계를 여타 차원
과 분명하게 구분하는 입장에 있다. 시각始覺에 속하는 상사각相似覺이
나 수분각隨分覺도 결국은 불각不覺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말류에 이
른 선풍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하다. 개선의 방향은 근본의
회복이다. 6조스님의 조계선이 뿌리로 세워지고, 백장, 마조, 원오, 대
혜 등을 조계 적자로 하는 기둥이 세워진다. 이 선문의 종장들이 보여
준 그대로 실천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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