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7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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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원문에 없는 설명식 문구를 더한 이유는 무엇일까? 원래 ‘예와
지금을 관통한다,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다, 만년이 한 생각이고, 한 생
각이 만년이다’는 등으로 열거된 경계들은 진여묘심의 특징인 동시에,
이것에 통한 사람이 체험하는 수승한 경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번
역문에는 여래장으로서의 진여묘심과 그것을 깨달아 내외의 경계에 움
직이지 않게 된 열반묘심의 수승한 경계를 함께 표현하고자 한 의도가
담겨 있다.
견성은 불성을 보고 눈뜨는 일인 동시에 존재를 실질적으로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본래의 미묘한 마음(本來妙心)을 보는 일은 곧 여
여부동한 열반묘심을 성취하는 일이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강
조하기 위해 이와 같은 설명식 번역문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견성은 진리의 얼굴을 보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
기도 한다. 이 경우 견성 이후, 실제로 존재를 바꾸기 위한 끝없는 노력
이 필요하다. 그래서 돈오점수와 같이 깨달음 이후의 수행이 필요하다
는 점수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점수론의 입장에서 보면 깨달음 이후의
보호와 맡겨 둠을 내용으로 하는 오후보임悟後保任 또한 몸을 바꾸는
장구한 실천에 속한다. 이 경우 견성성불은 ‘견성→성불’의 선후 관계가
된다.
그러나 성철스님에게 있어서는 ‘견성=성불’이다. 바로 보는 일은 곧
투철한 깨달음이고, 진여묘심에 통하는 일은 곧 열반묘심을 성취하는
일이라야 하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견성이 되었든 돈오가 되었든 조사선에서 말하는 모든
깨달음을 가리키는 용어는 부처의 구경각과 같은 자리를 가리키는 것
이라야 한다고 본다. 다만 성철스님이 자주 인용하는 어록 등에 한정해
보더라도 이러한 입장과 충돌하는 구절이 수시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
제7장 보임무심 · 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