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3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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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강조하기 위해 마음에 헛되고 거짓된 공부가 없다고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불학자들은 ‘시중時中’을 붙여서 ‘모든 시간 중에’로 해
             석한다. 모든 시간 중에 헛되이 버리는 공부가 없다는 뜻이 된다. 헛되

             이 버리는 공부가 없다는 말이나 헛되고 거짓된 공부가 없다는 말이나
             뜻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구두점을 바꾸고 뜻을 조절해서라도 그

             주장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성철스님의 언어 전략이 여기에서도 발견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②와 같이 ‘허虛’ 자가 ‘처處’ 자로 바뀌었다. 번역문에 ‘허가虛假한 공
             부가 없다’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처處’는 ‘허虛’의 편집 과정에서의 오

             류이다. 교정해야 한다.
                이렇게 오자를 교정해 놓고 보면 ③과 같이 ‘허기虛棄’가 ‘허가虛假’로

             변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헛되이 버리는’ 공부가 ‘헛되고 거짓된’ 공부
             로 바뀐 것이다. 성철스님은 유심에 기대는 공부는 ‘헛되고 거짓된’ 공

             부라고 보는 입장이다. 유심의 차원인 해오에 기대는 돈오점수를 그토
             록 배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공부 자체가 ‘헛되고 거짓된’ 공부이므

             로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헛되이 버리
             는’ 공부가 없다는 말은 모든 것이 공부가 되는 시절을 가리킨다. 상호

             비슷한 뜻을 전달하지만 돈오돈수의 수행론을 강조하기 위한 변환이었
             음이 확인된다.

                ④와 같이 ‘사마외도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魔外無捉摸)’는 구절을
             ‘마외魔外도 제휴提携하지 못한다(魔外無提)’로 바꾸었다. ‘짐작한다(捉摸)’

             는 것은 그 무심경계가 사마외도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차원이라
             는 뜻이다. 외도에게도 무상정無想定과 같은 무심의 수행이 있고, 기대

             고 의지하는 바가 없는 평온의 성취가 있다. 부처님이 한때 도를 배웠
             던 알라라깔라마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을 무심의 극치로 삼았고, 웃




                                                            제7장 보임무심 ·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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