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48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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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고, 걸음걸음에 머무는 곳이 없다. 이것이 바로 할 일을 마친 자유

               로운 스님이다.



            [해설]  중생이 중생인 이유는 자아를 진지로 하여 시비선악의 전선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 시비선악의 전선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본래의

            바탕에 마음을 돌리는 일이 수행이다. 그 본래 바탕에 녹아들어 본래
            면목을 바로 본 뒤라야 무심, 무사無事의 양육 공부가 시작된다. 성철

            스님은 여기에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계를 구경각의 성취, 대적
            삼매大寂三昧의 고요함으로 설명한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함은 6추의 거친 망상뿐 아니라 3세의
               미세한 망상까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10지와 등각도 일
               념불생一念不生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8아뢰야식의 미세무명이 그대

               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10지와 등각을 초월해 정각을 성취하고 나
               서야 비로소 본지本地, 즉 자성의 본래면목을 확연히 보게 된다.                    199



               인용문에서 ①과 같이 구어체 접미사 ‘자子’를 생략하였다. 뜻에는 변
            화가 없으며 문언문화하고자 하는 윤문의 결과이다.

               ②와 같이 ‘궁窮’ 자를 ‘극極’ 자로 바꾸었다. 성철스님은 이렇게 손을
            본 텍스트에 기초하여 ‘극오極奧하고 극심極深하여 본지本地의 풍광을 답

            착하고’의 번역문을 구성하였다. ‘극오하고 극심함’을 본지풍광의 경계
            를 수식하는 말로 해석한 것이다. 원문의 ‘극오궁심極奧窮深’이나 손을 댄

            ‘극오극심極奧極深’이나 심오한 경계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에서 뜻의 차이





             199   퇴옹성철(2015),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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