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6 - 정독 선문정로
P. 396
는 일을 경계하는 문장이 자주 보인다. 그럼에도 그것이 수행상의 혼매
함을 극복하고 한결같은 비춤의 상태에 도달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
는 점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원오스님은 소소영영함에 도달했지만 안
온한 자리에 도달하지 못하여 애를 썼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유정
중생과 무정 사물이 차별없이 드러나는 체험을 한다. 232 이로써 소소영
영함에 기반한 정밀한 수행이 있었기에 견성의 체험이 있었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원래 현사스님의 이 문장은 홍주종의 수증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입장 233 에서 나온 것이다. 소소영영을 궁극의 도달처로 보는 것이 집착
이라는 것이다. 사실 집착하는 측면에서 보자면 깨달음에 대한 지향도
집착이다. 그렇다고 깨달음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소소영영도
마찬가지다. 소소영영을 궁극의 도달처로 여겨 여기에 집착한다면 망상
의 출발이 된다. 그렇지만 그것은 치열한 수행의 끝에 체험하는 경계로
서 그 자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서산스님의 “여기 한
물건, 처음부터 소소영영한 이것 운운” 234 하는 문장이 관용어처럼 쓰여
온 한국 불교의 환경에서 소소영영은 긍정적 개념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
232 南岳單傳記』(X86, p.39a), “所謂天地同根, 萬物一體, 不能釋然, 恍恍惚惚, 昭昭
靈靈, 終未得安穩, 秋日過銅棺山頂, 頓覺情與無情.”
233 임제스님은 목전目前에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보고, 느끼고, 듣고, 아는 비추는
것에 주목하라 하였는 바(還是爾目前昭昭靈靈, 鑑覺聞知, 照燭底安一切名句), 현사
玄沙스님은 그러한 작용을 본성으로 이해하는 관점(作用卽性)에 대해 비판한 것
이다. 대체로 홍주종에서는 소소영영을 긍정하고, 현사스님이나 감산스님 등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한 것으로 얘기된다. 土屋太韋占, 「玄沙對昭昭靈靈的批判再
考」, 『宗敎學硏究』(2006년 제2기).
234 西山休靜, 『禪家龜鑑』, “有一物於此, 從本以來昭昭靈靈, 不曾生不曾滅, 名不得
狀不得.”
396 · 정독精讀 선문정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