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41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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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대혜스님은 무심이 승묘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경계의 차원

             에 있으므로 공부를 새롭게 지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내리고 있다. 이를
             위해 과거에 있었던 진정스님의 법문, 그것에 대한 오조스님의 감탄, 그

             리고 그 사연에 대한 원오스님의 회고, 무심의 경계에 걸렸던 광도자스
             님의 예를 함께 설한 것이다.

                성철스님은 여기에서 말하는 승묘한 경계가 오매일여의 대무심지를
             가리키는 것이라 보았다. 그러면서 오매일여의 무심지가 승묘하기는 하

             지만 그것이 일종의 경계에 해당하므로 구경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완전히 깨친 구경각의 입장에서 보면 오매일여를 넘어 다시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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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친 것이 제대로 눈을 뜬 것” 이라는 주장이다. 그래야 죽음 속에서
             크게 되살아나는 사중득활死中得活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용문에 표시한 바와 같이 생략, 변환, 추가의 방식으로 손질이 가
             해졌다. 대부분 문장의 분위기가 달라질 뿐 의미상의 큰 차이는 일어나

             지 않는 손질이다.
                다만 ⑤의 ‘이회理會’를 ‘이해理解’로 바꾼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

             펴볼 필요가 있다. ‘이회理會’는 이치를 깨달았다는 뜻이고, ‘이해理解’는
             이치를 알았다는 뜻이다. 비슷한 뜻이지만 굳이 구별하자면 ‘이해’는 분

             별의 차원이고, ‘이회’는 깨달음의 차원이다. 또한 ‘이해’는 부정적 의미
             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이회’는 긍정적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인

             용문은 광도자스님이 무심에 도달해서 ‘온몸이 있는 줄도 몰랐던’ 뛰어
             난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분별을 내려놓는다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문장이므로 온몸을 ‘알지 못했다(不理解)’가 ‘깨닫지 못했다(不理會)’보다
             적절하다. 성철스님의 고심이 느껴지는 손질에 해당한다.




              251   퇴옹성철(2015), p.206.



                                                            제9장 사중득활 ·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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