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57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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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모두들 더위가 싫다지만 나는 여름날 긴 하루를 좋아하네.(人皆苦
炎熱, 我愛夏日長.)”라는 앞 구절을 내놓고 신하들이 그에 어울리는 짝을
내놓는 현장이었는데, 유공권의 이 구절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선승들 간의 법거량은 이러한 작시 유희와 형식적으로 닮아 있다. 그
래서 어떤 중이 제기했다는 ‘모든 부처님이 몸을 나타내는 자리’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이후 여러 가지 답변이 나오게 된다. 원오스님은 유공
권의 구절을 빌려 대답을 대신한 것이다. 여기에서 성철스님은 원오스
님이 법당에 올랐다는 묘사, 한 중이 운문스님에게 했다는 질문, 운문
스님의 대답, 그리고 운문스님이 내놓은 대답의 일부를 모두 생략하였
다. 그런 뒤 ①의 간단한 개괄식 문장으로 이를 대신하였다.
성철스님은 법문이 옛날이야기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다. 그 흥미진진함이 법문의 핵심을 흐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단도직입으로 원오스님의 설법 현장을 몇 개의 글자로 구성하
여 그 상황을 개괄한 것이다.
②에 보이는 것처럼 중의 질문과 운문스님의 대답, 그리고 ‘만약 자기
였다면 그 질문에 다른 대답을 내놓았을 것’이라는 원오스님의 말이 생
략되었다. 이 구절이 들어오면 다시 중의 질문과 운문스님의 대답이 제
시되고 또 그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까마득한 무심
에서 화두참구를 통해 되살아나는 대혜스님의 오도 과정에 군말이 끼
어들게 된다. 생략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③과 같이 ‘전각이 한결 시원해졌다. 여기에서(殿閣生微涼, 向這裏)’의
구절이 생략되었다. ‘훈풍은 남쪽에서 불어오고’와 짝이 되는 구절이다.
선을 닦는 사람들이라면 이 훈풍과 시원함의 댓구를 잘 알고 있으리라
보았기 때문에 생략한 것 같다. 또 어차피 이 시구를 둘러싼 구체적 상
제9장 사중득활 · 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