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1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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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으로 답답해하기를 10년이 되었을 때였다. 어느 날 천목산의 불전 앞
에서 일 없이 거닐다가 우연히 눈길을 드는데 늙은 측백나무가 눈에 들
어왔다. 그 순간 설암스님은 이전까지의 경계가 모두 떨어져 버리고 가
슴에 막혔던 것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져 버리는 일을 체험한다. 이전까
지 얻었던 경계가 날아가 버렸으므로 주체(能)가 소멸한 것이다. 가슴에
막혔던 것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져 버렸으므로 대상(所)이 소멸한 것이
다. 성철스님은 이 구절을 생략하였다. 그리고는 늙은 측백나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주체와 대상이 소멸하게 된 상황만 남긴다.
성철스님은 실제 말하는 속도도 빨랐지만 도의 표현에 있어서도 빠
른 말을 구사하고자 한다. 불전 앞에서 산책을 하던 상황과 눈길을 드
는 동작에 대한 묘사는 청법자의 흥미를 일으키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
나 그것에 흥미가 쏠려 핵심을 놓칠 수 있다. 성철스님은 이것을 고민
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도 빨리, 표현도 빨리 함으로써 단도직입, 핵심
으로 들어가도록 문장을 구성한 것이다. 이것이 성철스님 문장 손질의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⑨의 ‘한 그루 늙은 측백나무(一株古柏)’의 ‘늙은 측백나무(古柏)’를 ‘마
른 측백나무(枯柏)’로 바꾸었다. 이 ‘마를 고枯’ 자는 ‘옛 고古’ 자의 오자
로 보인다. 다만 이것이 죽음과 같은 무심경계를 말하는 대목이므로 일
부러 바꾼 것일 수도 있으므로 교정할 수는 없다.
⑩의 ‘가슴에 막혔던 것들(礙膺之物)’이 생략되었다. 원래 이 문장은
‘얻었던 경계→날아가 버림(一時颺下), 막힌 것들→산산조각 남(撲然而散)’
의 주술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중간을 생략하고 앞
의 주어와 뒤의 술어를 합쳐 ‘얻었던 모든 경계가 산산조각 흩어져 버렸
다’는 새 문장을 구성한다. 어차피 움직임과 고요함의 분별이 일어나지
않아(動靜二相不生) 주체와 대상이 소멸하게 된(能所雙亡) 삼매와 깨달음
제9장 사중득활 · 4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