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7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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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고, ⑩에서는 ‘여기에서’라는 뜻의 구어체 ‘도자리到遮裏’를 문어체 ‘어
차於此’로 바꾸었다. 이로 인해 구어체 문장이 문언문으로 바뀌었다. 문
언문을 선호하는 입장이고, 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관책진』에 교
정된 문장이 있으므로 그것을 채용한 것이다.
⑪에서는 긴 문단이 생략되었다. 깨달음의 불완전함을 느끼던 고봉
스님에게 설암스님이 공부의 길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그런데 설암스
님의 공부길 안내에는 성철스님이 우려할 만한 대목이 보인다. ‘배고프
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잠에서 깨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
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고봉스님은 그간 치열한 수행으로 일관하여 꿈
속에서도 주인공으로 깨어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치열함은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이제까지 그것은 번뇌를 조복시키는 힘이었지만 이후
로는 보는 주체(能)를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
래서 설암스님은 잠 잘 자고, 밥 잘 먹으며 자연스럽게 수행에 임하라,
그리하여 과도한 자기 주체성을 해체하라고 당부한 것이다. 나아가 깨
어 있을 때 맑은 정신으로 화두를 참구하되 주체로서의 자의식이 일어
날 만한 모든 일, 예컨대 열심히 공부하는 일, 경전을 보는 일, 고금의
공안을 점검하는 일 등을 멈추라고 한 것이다.
이에 비해 성철스님 설법의 기조는 시종일관 간절한 공부의 의지를
내려놓지 말라는 데 있다. 사실 그것은 대부분의 공부인들에게 적용되
는 원칙이기도 하다. 잘 만큼 자고 깨어 있을 때 참선하라는 안내는 7
지보살에 진입하여 8지보살로 넘어가는 단계에 있었던 고봉스님 같은
경우에나 적용되는 것이지 일반 수행자들이 흉내낼 일이 아니라는 생
각에서 문단을 생략한 것이다.
⑫에서는 ‘지나고 나서(經及)’를 동일한 뜻의 ‘뒤에(後)’로 바꾸었다. 의
미의 변화는 없다.
제9장 사중득활 · 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