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9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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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깨달음의 장면에 대한 묘사에서 자신의 체험과 유사한 것이 있으면

             곧 그것에 근거하여 스스로 깨달음을 자처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우려
             가 생략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 있다.

                ⑮의 ‘천하태평天下太平’과 ‘일념무위一念無爲’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원
             문과 같이 천하태평이 앞에 오면 바로 앞의 구절과 순차적 관계로 연결

             된다. ‘지역 안정(安邦)’→‘국가 평정(定國)’→‘천하태평’의 점수적 노선이 그
             려진다는 말이다. 성철스님은 일체의 점수적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념무위와 순서를 바꾸어 ‘구경무심(一念無爲)’과 ‘구경각(天下太
             平)’을 등호로 연결한 것이다.

                번역문의 ⑯에서는 ‘주인노릇을 한다, 주인공으로 있다’는 뜻의 ‘작득
             주作得主’를 ‘일여一如하다’로 번역하였다. 화두에는 의미를 갖는 화두                        263

             와 의미를 벗어난 화두가 있다. 고봉스님이 참구한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가(無夢無想時, 主人公何在)’의 화두는 의미

             를 갖는 화두에 속한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현상으로서의 나를 포함하여 만사만물로 나타나는 법신과 통일을 이룬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주인공이 있다는 것은 나와 법신불
             이 일여하다는 뜻이 된다. 이것을 ‘일여하다’로 번역해도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다만 성철스님이 쓰는 ‘일여’라는 말에는 화두의 항일성이라는 의미

             가 강하게 담긴다. 이로 인해 주인공의 현전을 일여로 번역하면 의미상
             미묘한 차이가 발생한다. 주인공의 현전 여부에 대한 설암스님의 점검

             은 의식이 소멸하는 차원이 되면 그것이 어디에 있느냐에 초점이 맞춰


                 ‘
              263   꿈도 없고 생각도 없을 때 주인공은 어디에 있는가(無夢無想時, 主人公何在)’, ‘만법
                 이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 ‘염
                 불하는 자 누구인가(念佛者是誰)’ 등은 의미를 갖고 있는 화두이다.



                                                            제9장 사중득활 · 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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