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78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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⑬과 같이 깨달음의 계기가 되는 사건을 말하는 구절이 생략되었다.
고봉스님이 잠자리에 들어 화두를 참구하던 중 도반의 퇴침이 떨어지
는 소리를 듣고 의단이 깨졌다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이 퇴침 소리의 인
연을 생략하였다. 선사들의 오도인연은 소설처럼 흥미진진하다. 성철스
님은 흥미진진한 오도의 장면이 나오면 거의 생략한다. 그것이 수행자
들로 하여금 핵심을 놓치고 주변을 맴돌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생각했
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단이 깨졌다는 말만 남기고 그 계기가 되는 사
건의 묘사를 생략한 것이다.
⑭와 같이 깨달음의 경계에 대한 비유적 표현들을 모두 생략하였다.
깨달음은 주체와 대상의 분별을 포함하는 제반 분별이 사라지는 일이
므로 자유, 해방, 명료, 자연스러움, 편안함 등의 경계가 현현한다. 이것
이 나라의 안정, 국가의 평안 등의 표현과 겹치므로 일부만 남기고 생
략한 것이다.
나아가 이 장황한 묘사의 생략에는 보다 심층적인 고려가 담긴 것으
로 보인다. 우선 깨달음의 경계를 거듭 말하는 것은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아무 의미가 없다는 점이 고려되었을 수 있
다. 그 소망스러운 경계의 제시가 수행자의 마음을 급하게 만들어 의정
의 일어남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는 자기의 보배창고를 열
기 위해 그 열쇠의 비밀번호를 두드리기를 거듭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열리지 않으므로 간절함을 더해 가며 공부에 임하게 된다. 그것은 성철
스님이 인용문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이기도 하다.
다른 이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성철스님은 수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약간의 경계 체험을 깨달음으로 착각하는 수행 풍토를 비판하는 입장
에 있다. 수행의 여정에 있는 수행자들은 중도에서 체험하게 되는 경계
와 궁극의 깨달음에서 일어나는 경계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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