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92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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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한 공안의 하나로 남게 된다. 밤에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원칙을 지

            키면서 새벽에 도달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심에
            철저하면서 어떻게 밝음으로 나아갈 것인가?

               이들의 대화에 대해 조동종의 거장인 굉지스님이 평을 한다. 평창 중
            에 ‘어두움 속에 밝음이 있고, 밝음 속에 어두움이 있다~’ 운운의 구

            절을 작은 따옴표(‘ ’)로 묶었는데 이것이 석두스님의 「참동계參同契」에서
            가져온 것이기 때문이다. 굉지스님은 편정偏正의 논리로 ‘밤에 움직이지

            않되, 새벽에는 도달해야 한다’는 어불성설의 이치에 대해 설명한다. 그
            것이 명과 암의 불이성을 밝히는 중도의 실천이었다는 것이다.

               원래 조주스님은 큰 죽음에서 되살아나는 일을 물었다. 만약 여기에
            서 죽음을 버리고 살아남에 대해서 답한다면 그것은 중도를 상실한 자

            리이다. 버림과 취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투자스님은 어두움 속의
            밝음, 밝음 속의 어두움이라는 말을 통해 중도의 길을 제시한다. 성철

            스님 역시 굉지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대사즉활의 방점이 ‘활活’에만 찍
            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상사상활常死常活, 상활상사

            常活常死라는 어휘를 창안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해야 투자스님, 석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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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 굉지스님이 설한 것처럼 명암明暗이 쌍적雙寂하고 쌍조雙照함 을 드
            러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가져온 인용문
            에 표시한 바와 같은 손질이 가해졌다.

               ①에서는 ‘조주스님이 투자스님에게 물었다(趙州問投子)’는 능동문을
            ‘투자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질문을 받았다(投子因趙州問)’는 피동문으로

            바꾸었다. 이 유명한 대화는 대부분의 어록에서 능동문의 형식을 취하
            고 있고 인용 출처로 제시된 『굉지록』에도 능동문으로 되어 있다. 다만




             277   퇴옹성철(2015),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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