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496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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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 田地穩密密處와 活計冷湫湫時에 便見劫空하야 無毫髮
許로 作緣累하고 無絲縿許도 作障瞖①[翳]하야 虛極而光하고 淨
圓而耀하야 ②[歷歷]有亘萬古不昏昧底一段事니라
선문정로 전지田地가 안온安穩하여 밀밀密密한 곳과 활계活計가 냉담冷
淡하여 추추湫湫한 때에 문득 겁劫이 공空함을 보아서 호발毫髮만큼도
연루됨이 없고 사삼絲縿만큼도 장예障翳됨이 없다. 공허함이 지극至
極하여 광명이 있고 청정함이 원융圓融하여 조요照耀하니, 만고萬古에
뻗쳐 혼매昏昧하지 않은 일단一段의 사실이 있다.
현대어역 발 디딘 곳이 안정되어 빈틈이 없고, 살림살이가 차갑고 냉
랭해졌을 때 겁의 시간이 실체가 없음을 보게 되리라. 추호라도 인연
에 이끌리는 일이 없고 얇은 비단만큼도 가리는 일이 없게 되리라.
더할 수 없이 비어 있지만 빛으로 빛나고 완전히 청정하지만 밝게 비
추어서 만고에 변함없이 어둡지 않은 하나의 일이 [뚜렷이] 있다.
[해설] 굉지스님의 어록에서 가져온 문장이다. 간화선의 선사들은 강
력한 부정과 새로운 질문을 통해 고요함에 들어가는 길을 걷는다. 이
에 비해 묵조선의 선사들은 부드러운 긍정을 통해 본래의 고요함을 확
인하는 길을 걷는다. 굉지스님은 묵조선의 선사로서 본래 깨달음을 거
듭 제시함으로써 그것에 계합하는 길을 걷는다. 수행자들을 이끄는 법
문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굉지스님의 어록은 대부분 깨달음의 광경
을 묘사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인용문 역시 깨달음의 현장을 전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
다. 성철스님은 생각이 멸진한 죽음의 자리에서 크게 되살아나 구경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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