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55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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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 버린다. 그것은 마치 얼음이 지혜의 햇볕에 쬐어 다시 녹아 물이

                되는 것과 같다. [이미 녹아 물이 되어 버렸는데] 이제 또 얼음을 어
                디에 두느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미혹한 사람 가운데 두 배나 미혹한

                사람이라 하겠다.


             [해설]  한 수행자가 중봉스님에게 불성의 불이성과 평등성에 대해 질
             문한다. 불성이 각자의 조건에 따라 다르지 않고 평등하게 편재하며 모

             든 것이 불성의 표현이므로 악이라 해서 끊을 것도 없고 선이라 해서
             닦을 것도 없다는 주장이 있다. 탐진치라 해서 버릴 것도 아니고 계정

             혜라 해서 닦을 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에 대해서 어떻
             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이었다.

                중봉스님은 한마음으로서의 법계(一心法界)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 말
             이 틀리지 않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우주법계 전체가 한마음이라는 것

             을 몸소 깨닫지 못한 입장에서 함부로 말한다면 이 말은 위험하다. 만
             약 그것을 곧이곧대로 수용하여 범부의 저열한 욕망을 마음대로 발산

             한다면 계율을 파괴하는 등 갖가지 부작용이 창궐하게 되리라는 것이
             었다. 자기 마음의 마지막 티끌까지 남김없이 떨어낸 뒤라야 선과 악, 부

             처와 중생이 따로 없다는 말이 진실로 성립한다. 중봉스님은 여기에 더
             해 만약 마음의 티끌을 떨어내지 못한 사람이 그 원리만 주장한다면 호

             랑이를 그리려 하다가 개를 그리는 꼴이 되리라는 경고를 잊지 않는다.
                그러자 수행자가 다시 질문을 한다. 탐진치 등이 모두 자기 마음임을

             깨달아 끊으려 하지도 않고 끌려가지도 않은 차원에 도달한 뒤에는 그
             탐진치는 어디에 있게 되느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중봉스님은 얼음이

             이미 녹아 물이 되었는데 다시 얼음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
             성립하겠느냐는 답변을 한다. 이 인용문이 그것이다.




                                                            제13장 해오점수 · 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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