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60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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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와 같느니라.
현대어역 어떤 사람이 큰 은혜를 베풀어 진수성찬을 차려 준다 해도
먹지 않으면 굶어 죽습니다. 많이 듣기만 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해설] 『화엄경』 「명난품明難品」의 문장이다. 이 문장은 불법의 열 가
지 쟁점에 대해 문수보살이 질문하고 여러 보살들이 대답하는 형식
을 취하고 있다. 인용문은 중생들이 정법을 듣고도 어째서 번뇌를 끊
지 못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법수法首보살의 답변에서 가져온 것
이다. 법수보살은 설법을 많이 듣는 것만 가지고는 여래의 법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리고는 아홉 가지의 비유를 들어 그 이유를 설
명한다. 법수보살의 비유를 보면 설법을 많이 듣는 일 자체를 부정하지
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바른 실천이 없는 경우만을 문제 삼는 것
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이 게송을 인용한 뒤 서슴없
이 “광학다문廣學多聞은 오도悟道에 제일 큰 장애로 이를 극력 배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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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고 단언한다. 왜 그런가?
사실 다문지해가 어째서 번뇌를 끊지 못하느냐는 질문에는 표층과
심층의 두 질문이 담겨 있다. 첫째는 표층적 질문이다. 설법을 많이 들
어 이해했다면 그 가르침대로 번뇌가 소멸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
이다. 이 질문은 듣기만 하고 실천이 없기 때문이라는 답변으로 해소된
다. 둘째는 부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에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유
심 차원의 일이 되지 않겠느냐는 심층적 질문이다. 물론 답은 준비되어
있다. ‘설법과 같이 실천하는 일(如說行)’이 곧 유심의 차원을 떠나는 일
427 퇴옹성철(2015),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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