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03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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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다만 지금 당장의 임금님 이름만 건드리지 않으면 지난 왕조에
혀가 끊긴 재주꾼보다 나으리라. 편중지偏中至는 두 개의 칼날이 서로
부딪쳐도 피할 필요가 없는 격이다. 솜씨를 발휘하면 그대로 불 속에
피어나는 연꽃과 같아 저절로 충천하는 기운이 있는 듯하다. 겸중도
兼中到는 있음과 없음의 양변에 떨어지지 않으니 어울리는 소리를 낼
자가 없는 격이다.
사람들은 모두 일상의 흐름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잿더미 속으
로 돌아가 앉는 일과 같다. 부산원록공浮山遠錄公이 이 공안을 가지
고 조동5위의 대표로 삼았다. 만약 한 공안만 깨달으면 나머지는 저
절로 깨닫게 될 것이다. 암두스님이 말하였다. “마치 물 위의 호로박
과 같아서 누르기만 하면 바로 돌아 조금의 힘도 쓸 필요가 없다.”
일찍이 한 중이 동산스님에게 물었다. “문수, 보현이 도를 물으러 올
때는 어떻습니까?” 스님이 대답하였다. “물소 떼 속으로 쫓아버려
라.” 중이 말하였다. “스님이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쏜살같습니다.” 스
님이 말하였다. “오로지 타력 덕분이지.”]
동산스님이 말하였다. “왜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지 않는
가?” 이것은 편중정偏中正이다. 중이 “어떤 것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하고 묻자 스님이 대답하였다. “추울 때는 그대를 최고로
춥게 하고, 더울 때는 그대를 최대한 덥게 한다.” 이것은 정중편正中
偏이다. 이처럼 본래 바르지만 현상적으로 치우치고, 현상적으로 치
우치지만 본래 바른 것이다. 부산원록공浮山遠錄公 법원法遠스님이 이
공안을 가지고 조동5위의 대표로 삼았다.
[해설] 『벽암록』 제43칙 동산무한서처洞山無寒暑處 공안에 대한 원오스
님의 해설(評唱)에서 가져온 문장이다.
제18장 현요정편 · 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