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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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불성은 무엇인가? 그래서 성철스님은 『육조단경』의 문장을 인용하
여 불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것이 불
성임을 강조한다. 이 일상사에 3신과 4지의 모든 공덕이 다 구비되어
있으니 이것만 바로 알면 된다는 것이다.
6조스님의 전기에는 불성에 대한 흥미로운 언급이 두 번 발견된다.
처음 5조스님을 찾아갔을 때 “사람에게는 남북의 구별이 있지만 불성
에는 남북이 없다.”라고 한 것이 그 하나이고, 신수스님의 게송에 대해
반론의 형식으로 제시된 게송이 다른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그것은 “본
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있겠는가.”라는 구절이었다고 알려
져 있다.
그런데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이 구절이 “불성은 항상 청정하니(佛性
常清净), 어디에 먼지가 있겠는가.”로 되어 있다. 원래 이 게송은 판본에
따라 글자의 출입이 다양한데, 그중 ‘본래 한 물건도 없다’는 표현이 그
절묘함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수용되어 왔다. 그런데 돈황본이 선행한
다는 점을 생각하면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가 6조스님의 원래 게송일
가능성이 높다. ‘본래 한 물건도 없다’가 반야사상이라면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는 열반사상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열반사상과 반야사상은 중국 선종의 두 개의 큰 기둥이다. 보통
6조스님 이후 선종의 소의경전이 불성의 『능가경』에서 반야의 『금강경』
으로 대체되었다고 이해된다.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가 ‘본래 한 물건도
없다’로 교체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항상 청정한 불
성’이 원래 게송이라면, 6조스님은 불성적 긍정(表)과 반야적 부정(遮)을
통일하는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철스님은 이러한 6조스님의 문장
을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묘유妙有의 열반불성론과 진공眞空의 반야성
공설을 불이不二의 자리에서 만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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