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5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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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 본성은 변함없이 머물게 된다. 불성이 있으므로 여래의 열반은 일
체의 분별을 떠나 있다.
이와 같이 나와 대상의 구분 없이 모든 현상에 불성이 관통하고 있
으므로 돈오가 성립한다. 한 걸음도 움직일 필요 없이 지금 당장 불성
과 한 몸으로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번뇌와 습관의 힘이 만만
치 않다. 그래서 그것을 걷어내는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다만 불성을 알아 번뇌를 다루는 수행이 있고, 불성을 모르고 번뇌
와 씨름하는 수행이 있다. 그래서 불성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수행은
차원 자체가 다르다. 본래 밝은 눈의 백태를 걷어내는 일이므로 빠르고
완전하다. 구름 뒤에 보름달이 있음을 알고 있으므로 눈 뜬 뒤에 의혹
이 없다. 땅 아래에 물이 있음을 알고 있으므로 우물을 파는 일에 신념
이 있다. 등불이 본래 밝음을 알고 있으므로 등 유리를 닦아 그 밝음
을 해방시키는 일에 의심이 없다.
이 인용문은 불교의 ‘깨닫는다’는 말이 본래 갖춘 불성에 눈을 뜨는
일을 가리키는 것임을 드러내는 문장이다. 여기에서 성철스님은 불성을
하나님과 동의어로 해석한다. 모두가 불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임을 선언하는 일이며, 그러므로 이 불성론이야말로 불교의 우
수성이 드러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가치를 바로 이 죄인이 전혀 부족함 없이 완
전히 구비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개개인 속에 다 하나님이 있어서
하나님 아닌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불교의 주장이다. 이는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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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불교의 우수성이다.
41 퇴옹성철(2015), p.54.
제2장 중생불성 ·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