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7 - 정독 선문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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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마계에 들어가 바른 인연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다. 그저 주지 노
릇하는 데 애를 쓸 줄만 알고 선지식을 자칭하면서 세상의 헛된 명
예만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니 어떻게 자신에게 악이 닥쳐오는 일을
논하겠는가? 후학들의 귀를 먹게 하고 눈을 멀게 할 뿐만 아니라 종
문의 가르침을 쇠락 피폐하게 하는 것이다. 높고 넓은 법왕의 자리에
오르느니 차라리 지옥의 무쇠 침상에 눕는 것이 낫고, 순타의 마지
막 진수성찬을 받느니 잠시 지옥의 구리 녹인 물을 마실지어다. 모름
지기 크게 전율하며 스스로 안주하지 않아야 한다. 대승을 비방하
는 죄는 작은 과보가 아니다.
[해설] 법안스님의 『종문십규론』에서 가져온 문장이다. 법안스님은
수행자를 편달하기 위해 선문의 병통 열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자기
의 마음 바탕을 밝게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남의 스승이 되는 일, 둘
째, 종문의 가풍만을 편들고 지키면서 소통과 논의를 무시하는 일, 셋
째, 조사의 공안을 들고 법의 요체를 제시한다면서 살활자재한 선문의
전통을 모르는 일, 넷째, 때와 상황에 맞는 문답을 하지 못하고 종사의
안목을 갖추지 못한 일, 다섯째, 이치와 현상이 서로 호응하지 못하고
걸림과 청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일, 여섯째, 지해를 말끔히 걷어내지
못하고 고금의 언어들을 억측하는 일, 일곱째, 표면적 의미만을 기억할
뿐, 자기화하여 때에 맞게 적절히 활용할 줄 모르는 일, 여덟째, 경전에
통하지 못했으면서 함부로 인용하여 증명하는 일, 아홉째, 성율을 무시
하고 이치에 통달하지 못하면서 게송 짓기를 즐기는 일, 열째, 자기의
단점을 변호하면서 승부 다투기를 즐기는 일이 그것이다.
열 가지 병통 중에 깨닫지 못하고 남의 스승이 되는 일이 가장 먼저
제시되어 있다. 자기 경계에 도취되어 깨달음을 선언하는 대망어가 가
제19장 소멸불종 · 927